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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일 삼호주얼리호 선원 구출작전에서 해적을 소탕한 UDT/SEAL 대원들. |
지난 21일 삼호주얼리호
선원 21명(한국인 8명, 외국인 13명)을 큰
피해 없이 구출한 우리군의 특수전 병력
UDT/
SEAL 대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흔들리는 링스헬기에서 해적들을 조준사격해 사살하는,
세계 정상급
특수부대인 미해군의 SEAL 부대도 하기 힘든 임무를
수행해
해외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고(故) 한주호 준위의 UDT/SEAL 후배이기도 한 이들의 임무수행에 대해 합참관계자는 “대원 20여명이 3정의 고속단정에 나눠타고 주얼리호 함미(艦尾)에 접근해 승선하는 과정에서 김 대위가
선두에서 작전을
지휘했고, 선장을 구출하기 위해 조타실에도 직접 진입했다"며 "UDT/SEAL팀은 이날 작전 막바지에 해적 4명과 30여분간 총격전을 벌여 2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다"고 말했다.
삼호주얼리호가 피랍된 지점에서 2000km 떨어진
아덴만에서 활동중이던 최영함에는 특수전(UDT/SEAL) 요원으로
구성된 검문·검색팀, 해병경계대 등 300여명이 탑승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군 작전능력을 보여준 우리 군의 UDT/SEAL에 알아보기 위해
전역한 요원들로 구성된 UDT(Underwater Demolition Team)동지회 관계자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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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DT/SEAL 혹한기 훈련 한 장면. |
이 관계자는 “우리 후임들이 큰일을 해냈다”며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덴만에서의 활약을 포함해 다양한 작전, 예를 들면 북파공작 임무, 요원 암살 임무 등을 수행하는
훈련을 받으며 국가를 위한 충성심이 흔들린 적은 없지만, 전역한 이들에 대한 국가의 처우는 형편없다는 것이다.
우선 이 관계자가 건네준
자료를 통해 UDT 요원들의 창설배경과 훈련과정을 알아보기로 했다. 자료 특성상 군
전문 용어가 많고 이들의 주장을
가감 없이 전하기 위해 전문을 싣는다.
UDT 특수임무수행부의 역사적 근거와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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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의 역사 해군첩보사의 희생자 UDT 북파공작원 및 그 훈련자들
목 차
Ⅰ. 해군 첩보대와 UDT 부대의 창설배경
1.6.25전쟁 전후 대북파공작원 양성의 산실로서 UDT창설 배경
1) 6.25 전쟁 초기 美 UDT의 활동
(1)미군에 의한 해상침투 및 해안내륙으로 특수작전부대 및 연합군 잠수함인 "Perch艦"함에 승조, 대북 첩보활동 및 특수파괴공작업무 수행 (2)한국 영도유격부대 교육훈련 및 해상공작대 조직, 특수공작 투입, 해상공작유격대원 특수공작과정 해외훈련 교관 최초훈련 : '50년 10월, 14주, 대위 노능서 등 15명 이후 300여명 훈련장소 : 일본 시가자끼 (3)CIA 한국 해상특수공작대(BG-SMG/UDT) 창설 최초훈련 : '51년 7월~12월, 16주, 오 박 등 10명 이후 58명 훈련장소 : 부산 영도 CIA 기지
2)전쟁 중 후반, 육상 및 공중으로의 대북 침투공작 한계 인식
3)戰後, 한국 UDT부대 창설의 연역
전쟁을 전후로 美 CIA, CIC에 의한 첩보공작부대 유지(해군, 해군 육전대)에서 한국전쟁 승리의 주역인 美 해군 UDT를 모방한 특수부대 편성이 필요하였다. 당시 미국의 한국 특수공작업무는 美 UDT, 해군정찰대, 첩보대에서 수행하였고 이들에 대한 통제는 CIA, 美8軍에서 수행하였다.
'54년 2월 :美 UDT 철수 '57년 4월 :美 8軍내 CIC 철수 '56년 말 :美 CIA 한국본부 철수(韓 민간공작원 일부 해군정보대 배속) '54년 6월 : 한국함대 상륙지원대 수중파괴대(UDT)편성 '54년 7월 : 부대창설을 위한 특수파괴공작과정 유학자 선발 '55년 7월 : 유학자 7명을 UDT 교관에 임명, UDT-1기 교육실시 '55년 11월 : UDT-1기 26명 수료
2.해군 첩보부대의 연혁 및 요원보충내역
1)해군첩보대의 명칭: onI, 해군첩보대, NRU, UDU, NIU(해상정찰대), 개발단 등
(1)ONI : 美 해군 정보국을 본딴 '50년대 해군특수공작대 (2)해군첩보대 : '48년 해군 작전국 내 정보과 창설 이후 정보부대 중 첩보대 (3)NRU : '60년대 해군정보국 내 해양정보대, 일명 '해상정찰대' (4)NIU : 해상정찰대-해군정보부대 총칭(정찰대, 전박대, 지원대, 본부대, 기지대 등) (5)UDU : '60년부터 자체 사용한 명칭으로 "해군첩보 수중파괴단"이라 함. NIU 해상정찰대 요원중 UDT요원들이 해당됨. (6)개발단 : 1983년 이후 국군정보대로 통합 관리된 후 개발단이라 칭함. 개발단의 어원: 美 정보국의 별칭으로 전투개발단(CRDG)을 사용했으며, 현재 이 명칭 은 美 해군 UDT/SEAL 부대의 SEAL Team-6의 별칭임.
2)해군첩보대(위장명 UDU)의 년도 별 훈련연역
6.25 전쟁이후 1955년 해군에서 정보요원을 차출하여 미 싸이판으로 정보요원을 발탁하여 유학훈련을 보내어 첫해 18명, 56년에 2차 유학에 20명을 배출하였다. 이후 58년 서해 해군기지에서 해군 신병 64기에서 20명과 육군첩보대 2명이 UDT 훈련을 마치고 북파공작에 투입하였다. 이후 70년까지 북파공작원 훈련을 UDT 부대에서 실시하여 훈련을 마친 요원들을 해군첩보대로 전속시켜 북파에 바로 투입되었다. 71년 5월 5월 해군첩보부대령에 의해 UDT요원으로 구성된 교관단에 의해 UDU부대가 창설되고 이후UDU부대의 독자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신설 2010.10.27> 기본교육훈련과정(제4조제1항제2호가목 관련) ○ 해군 첩보대 기본교육훈련
Ⅱ. UDT 훈련의 실체
55년에 미군에 의해 창설된 UDT 부대는 외양은 정규부대로서의 활동을 하였으나 실제로는 해군 정보사 및 각 타군의 첩보부대가 육상 및 공중침투가 어려워지자 해상을 통한 북파침투를 위해 해군의 특수공작 훈련과정인 UDT 훈련과정을 이수케 하였으며, 특히 각군 첩보부대 개편과 창설에는 UDT 훈련 이수자들을 위주로 창설하였고, 71년 첩보대로 창설된 해군정보부대의 경우 71년 자체교육이 있기 전 까지는 UDT 훈련과정을 이수케 하거나 UDT 요원들을 수시로 차출하여 인원을 보강한 후 북파공작활동을 수행하였으며 71년부터 시작된 자체 교육은 상당 수의 UDT요원들을 발탁하여 교관으로 임명 후 UDU 훈련과정(UDU-1기)을 만들어 현재까지 요원양성을 하고 대원들을 교육시켰으며 현재도 UDU의 훈련에 UDT 부대와 똑같은 훈련을 시키고 있다.
1.육군 첩보대(HID) 위탁훈련
전쟁 이후 美國과 국방부의 특수공작원 해체계획에 따라 전역 및 전방의 모든 부대에 분산 배치, 이후 이렇다 할 특수공작은 없었으며, 이들은 배치된 자대에서 수색정찰 및 교란위주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거의 전역 및 월북. 공작원의 부족과 특수공작의 필요성을 느껴 '58년 첩보부대 창설, 창설인원으로는 한국전쟁 중 KLO 및 HID요원으로 구성되어 교육훈련 및 특수공작 임무 주도. 이들은 전쟁 중 美軍에 의한 싸이판, 시가자키 등에서의 육상 유격전술과 해상에서는 하급 수영능력보유 위주의 능력만 있었으며 전천후 특수공작요원으로는 자질이 부족하였음. 이 때문에 해상/해중침투능력 습득을 위해 60년 5월 해군첩보부대 북파침투 훈련의 산실인 해군 UDT부대에 위탁교육을 실시, 총36명(해군첩보대에 16명, 육군첩보부대에 20명 )이 교육 후 자부대로 전속되어 육군 특수공작요원의 해상침투 훈련에 활용하였음.
2.공군 첩보대(OSI) 교관단 위탁훈련
공군에서 '63년(UDT 9기)부터 65년까지 6명이 UDT교육을 받았으며, 이들 요원중 일부가 김신조 남파사건이후 공군첩보대에서 창설된 684부대(일명:실미도)의 교관요원으로 투입되어 요원들을 훈련시켰다. 공군첩보대는 '71년 한국공군 첩보부대 창설 후 4년만인 '75년 해체되었다.
3.해병대 첩보대(MIU) 교관단 및 요원들의 위탁훈련
'68년 3월 창설된 MIU는 교육훈련만 실시하다가 '72년 해체되었다. 65년부터 UDT 훈련을 이수한 요원을 위주로 창설되었으나 북파공작 임무를 수행한 적은 없다. 공식적으로 '75년 해체되기전까지 해병대에서 UDT위탁수료자는 퇴교자를 제외하고 총 29명이었다.
Ⅲ. 해군 첩보대(UDU) 북파공작원 양성수단인 UDT 훈련
1. 1970년 이전: UDT부대에서 북파공작원을 직접 양성후 해군 첩보대(UDU)에 전속
종전 후 '55년, 美軍 정보국 산하 해군 정보요원들과 민간인들이 싸이판 기지의 美 해군 기술학교(NTTC)에서 정보기본교육과정(13주/약 20명)을 美 UDT요원들에 의해 교육이수, 이듬해 육군 정보요원들과 같이 두번째 싸이판훈련을 다녀온 후로 주로 함정/단정에 의한 해상정찰위주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단 2회의 싸이판 훈련후, 서해 모처에서 정보국에 의해 '58년 육군첩보부대가 창설된 후 60년 5월 해상공작요원 보충을 위해 해군첩보부대 및 육군 첩보부대(HID)에서 80명을 모병하여 UDT에서 훈련을 시켜 육군첩보대 19명, 해군첩보대 13명만 배출하여 북파공작업무에 바로 투입되었다. 이들이 바로 UDT 6기생들이다.
1971년 5월5일부로 해군첩보대가 창설되기 전까지 해군의 모든 해상대 북파특수공작은 UDT대원들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해상정찰대(해군 첩보부대-정보국)의 인원이 20여명 이하로 될 때마다 UDT에서 인원을 수시로 보충하였다. UDT요원을 양성 후 첩보대 소속으로 신분을 변경시켜 북파공작사업에 참여케 한 것이다.
2. 1971년 이후 해군첩보부대 교관단 양성
해군첩보부대령 [국방부령 제216호 1971. 5. 5] 에 의해 해군 첩보부대가 창설 되면서 그 명칭은 공식적으로 UDU라고 칭하였다. (이전엔 NIU내 해상정찰대의 UDT요원 들을 "해군첩보 수중파괴단(UDU)"라고 명명하였다) 1971년 부대창설시 제1기 훈련자들의 교관은 그때까지 요원을 충원받던 UDT 부대로부터 교육단 요원을 차출하여 자체 북파공작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로부터 UDU부대의 기수는 UDT기수를 그대로 이어받아 UDU 1기가 아닌 UDU 17기로 시작하여 현재에 이러고 있다.
Ⅳ. UDU와 UDT 양대 기관에서 지속된 북파공작요원의 양성
1971년 이후 실제로 북파공작업무가 부여되지 않았음에도 UDU와 UDT부대의 훈련은 강도의 변함이 없이 지속 되었다. 1971년 이후 해군첩보대 UDU와 육군첩보대 HID 요원들이 훈련 이후 북파공작업무를 수행 하지 않았듯이 UDT 훈련자들 역시 비인간적인 가혹한 훈련에서 살아남았지만 특수임무수행 명령은 하달 받지 못한채 다시 그 훈련을 후배 UDT요원을 양성시키는 방식을 30년이 넘게 되풀이 해온 것이다. UDT 훈련자들은 3~4년의 군 복무기간을 보낸 후 대부분 전역하였다.
1.71년이후 UDT부대의 훈련이 북파공작 훈련임을 증명하는 자료들
1) 훈련 이수률
71년 첩보부대 창설이후 UDT부대의 훈련은 종전과 다름없이 지속되었다. 55년부터 70년까지의 훈련과정은 매년 100여명이 입교를 하여 평균 2~30여명의 요원만 양성하는 혹독한 훈련이었다. UDT훈련은 인간에게 최고의 고통을 주어 최상의 인간병기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훈련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평균 2~30%밖에 되지 않는다. 그 훈련은 71년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종전보다 인원이 늘어났지만 이는 지원자 대비 했을때 훈련의 강도는 종전과 변함없이 지속되었음의 증거이다.
2) 훈련 교관단의 중첩
UDT교관단에 의해 시작된 UDU 1기 훈련과 그들을 훈련시킨 UDT요원들에 의한 UDT부대의 훈련은 동일한 것이었다. 또한 UDU1기에서 훈련을 마친 요원이 다시 UDT부 대로 전속되어 후배들의 UDT훈련을 담당하였다. 이 두대의 훈련은 연속선상에 존재 하였고 같은 목적의 훈련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3) 양대기관 부대장들의 교환근무
UDT와 UDU 양대기관에서 북파공작요원을 양성한 부대장들은 수시로 교환근무를 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두 기관의 훈련이 똑같았다고 진술하였다.
4) 훈련방식, 훈련유형의 존속
71년 이후 UDT 부대의 훈련은 기존의 훈련교관과 훈련방식, 훈련유형을 그대로 지속하였지만, 국가로 부터 어떠한 명령도 받지 못했다. 해군첩보부대로 전속되어 북파공작을 한다는 사실은 이미 모든 교관요원과 훈련생들이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로 부터 그 훈련에 대한 중지명령이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훈련은 그대로 지속되었고 그 훈련에 참여하는 UDT부대원들은 그 훈련이 북파공작관련 특수임무수행을 위한 훈련으로 인식하고 지금까지 훈련을 시키고 받아온 것이다.
2.비인간적인 UDT훈련의 실체
71년 이후에도 UDT 훈련에는 인육을 먹어야 하는 비인간성이 포함되었으며 모든 훈련은 북파공작원으로서의 정신적, 육체적 모든 조건을 갖추는 훈련들로 구성되었다. UDT 훈련이 북파공작의 상징성으로 인식되었고 북파공작 작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UDT훈련의 모든 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당위성에 의해 어떤 훈련에 대해서도 강제성, 비인간성에 문제를 제기치 못하고 비정상적 사고의 인간형으로 쇠뇌화 되었다. 인간의 인육을 식음하면서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훈련자와 피훈련자들의 비인간성과 인권침해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정신이상 그 이상인 것으로 고착되었다. 그것이 바로 UDT 부대였다. 그러한 정신의 소유자로 변신되는 이유는 그 훈련이 북파공작요원 양성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훈련자와 피훈련자 모두 정상적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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