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허공 속으로 들어가라.
의지할 곳도 없고, 영원하며, 고요한 허공 속으로."
허공의 세 가지 성질인 의지할 곳 없슴과 영원함과 고요함이 이 방편 속에 주어져 있다. 의지할 곳이 없다는 말은 당신의 에고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원하다는 말은 끝날 수 없다는 말이며 고요하다는 말은 침묵을 의미한다.
이런 허공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은 당신 속에 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의지처를 구해왔다. 사람들은 나를 찾아온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고요하게 앉아서 눈을 감고 아무 것도 하지 마라'라고 말하면 그들은 어떤 avalamban를 구한다. 의지할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의지할 만한 어떤 mantra라도 주십시오. 저는 아무 것도 않하고 앉아 있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앉아 있는 것은 어렵다. 사람들에게 만트라를 주면 그때는 문제없다. 그들은 앉아서 몇 시간이고 계속 만트라를 반복한다. 정말 대단한 인내심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있다.
그 의미가 문제다. 그것 때문에 당신은 텅 비어질 수 없다. 당신은 뭔 가를 계속하고 있다. 거기에 행위자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행위자는 부산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은 옴칼(Aomkar)이나 Aum, Ram이나 Jesus, Ave Maria 등등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은 어떤 것으로 자신을 채울 수 있다. 그때는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당신은 만사 okey다. 마음은 허공에, 텅 빔에 저항한다. 항상 뭔 가가 거기에 채워져 있기를 원한다. 마음이 뭔 가로 채워져 있슬 때 그것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텅 비어지면 그것은 사라질 것이다. 텅 빔 속에서 당신은 마음 없슴을, 무심(無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의지처를 구한다.
당신이 내면의 공간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의지처를 구하지 마라. 모든 의지처를 내버려라. 만트라를, 신들을, 경전들을, 당신에게 의지할 곳을 준다고 느껴지는 모든 것을 내다 버려라. 그리고 단지 내면으로 들어가라.
거기에 두려움이 있슬 것이다. 당신은 공포를 느낄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어떤 곳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출해 왔다. 그래서 다시 그 곳으로 돌아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비빌 수 있는 언덕이, 정박할 수 있는 강 둑이 사라져 버린다. 강물은 당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당신의 의지처는 사라졌다. 당신은 무한의 심연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공포가 당신을 둘러싸면 당신은 다시 의지처를 구한다. 그것이 거짓된 의지처라도, 당신은 좋아할 것이다. 가짜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음은 의지처가 진짜인 지 가짜인 지 가리지 않는다. 의지처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거기에 어떤 것이 있다. 당신은 그것에 기댄다.
언젠가 한 남자가 내게 왔다. 그는 자신이 집에서 유령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무척 걱정을 했다. 그 걱정들 때문에 더 많은 헛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걱정들로 인해 점점 약해지고 병까지 났다. 급기야는 그의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계속 이 집에서 살겠다면 나 혼자라도 집을 떠날 거에요."
그의 아이들은 이미 친척집으로 보내져 버렸던 것이다. 그 남자는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저는 그것들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것들은 밤이 되면 집안 구석구석을 걸어다닙니다. 집 전체가 유령들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당신이면 저를 도울 수 있슬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내 사진을 한 장 주면서 말했다.
"이것을 갖고 있어라. 이제 나는 그 유령들에게 제재를 가할 것이다. 이제 그대는 편히 잠들 수 있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라. 이제 그들은 내가 맡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보러 갈 것이다. 이제 그것은 나의 일이니 개가 어떻게 하든 내 일에는 상관하지 마라."
그 남자는 다음 날 와서 말했다.
"저는 잠을 푹 잤습니다. 아주 기분이 상쾌합니다. 당신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단지 그에게 의지처가 되어 주었슬 뿐이다. 나라는 의지처를 통해서 그의 마음은 편안해질 수 있었다. 그의 마음에 나에 대한 인상이 가득 차게 되었다. 이제 빈 공간이 없어졌다.
일상 생활 속에서 당신은 거짓 의지처들에 의지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실제로 도움이 된다. 당신이 충분히 강하지 않는 한 당신은 그것들을 필요로 히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방편이 궁극적인 방편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로 그 때문이다. 어떤 의지처도 없는 상태로 바로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붓다가 죽어가고 있슬 때 아난다는 그에게 물었다.
"이제 당신은 우리를 떠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는 이제 어떻게 수행을 계속 해야 합니까? 스승은 가버리고 우리는 어둠 속에서 수 많은 생을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를 인도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빛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그 상황이 그대에게는 더 좋을 것이다. 내가 사라지면 그대는 그대 자신의 빛이 된다. 홀로 움직여라. 어떤 의지처도 구하지 마라. 의지처가 바로 마지막 장벽이기 때문이다."
결국 붓다는 죽었고 그때까지 아난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는 40년 간을 붓다와 함께 있었다. 그른 그림자처럼 붓다를 따라 다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는 붓다의 은총을 받아 왔다. 그래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아난다는 여전히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붓다가 죽은 다음 날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그 다음 날이다. 붓다에게 의지한 바로 그 행위가 장벽이었던 것이다. 이제 붓다가 사라지자 아난다는 어떤 의지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려운 것이다. 당신이 붓다와 함깨 산다면 붓다가 가 버리고 나면 당신은 누구에게도 의지처를 구할 수 없다. 이제 당신에게는 의지할 거처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온 세상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한번 당신이 붓다와 그의 자비를 맛본 다음에는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어떤 사랑이나 자비도 없다. 그때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맛볼 가치가 없다. 그래서 아난다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혼자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의지처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가장 지고한 의지처를 알았기 때문에 그것보다 유치한 것은 도저히 눈에 차지 않았다. 결국 다음 날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내면의 공간으로, 의지할 곳 없고 영원하며 적막한 허공 속으로 들어갔슴이 틀림없다. 그러니 기억하라. 어떤 의지처도 찾지마라. 그저 떠돌아라.
만약 당신이 이 방편을 시도하려 한다면 그때는 어떤 것에도 소속되지 마라. 적을 두지 마라. 이것이 바로 J. Krishanamurti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소속되지 마라. 스승에게 집착하지 마라. 경전에도 의지하지 마라.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마라."
그리고 모든 스승이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우선 자신에게 집착하도록 당신을 이끈다. 그리하여 당신이 스승과 매우 가까워졌슬 때 그는 그 의존 관계를 끊어야 할 시기를 안다. 그리고 그는 냉정하게 끊는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다른 누구에게도 의존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때 갑자기 당신은 의지처를 잃게 된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불행해질 것이다. 당신은 울부짖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부터 당신은 홀로 서게 될 것이다. 어떤 의지처도 없이 홀로 있게 된다.
"허공 속으로 들어가라. 의지할 곳 없고, 영원하며, 고요한 허공 속으로."
허공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허공은 절대적으로 고요하다. 거기에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소리의 진동도 없다. 어떤 잔 물결도 없다. 모든 것이 고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당신 속에 있다.
어떤 순간에라도 당신은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문을 열려 있다. 모든 사람을 초대하고 있다. 그러나 용기가 필요하다. 혼자 있슬 용기, 비워질 수 있는 용기, 자신을 녹여 없애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이 내면의 공간 속에서 죽을 수 있다면 당신은 결코 죽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당신은 amrit를, 불멸을 성취할 것이다.
이 탄트라는 2009년 3월 21일부터 시작한 것이니까 꼭 일 년 반 만에 끝났다. 실로 인도 베단타 철학의 집대성이고 冥想(Dhyana)의 완성품이다. 이 경전은 정말로 인류가 일궈낸 최대 역작이다.
이것을 번역하면서 초록색 漢字로 쓴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중국 禪詩와 佛經과 일치되는 부분를 쓴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읽고 교정을 할 작정이다. 아직 새로운 책을 구하지 못해 다음에는 '日本의 禪文化'를 써볼 생각이다.
111.
"사랑스런 그대여,
앎과 알지 못함에 대해서,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에 대해서 명상하라.
그때 그대가 처한 양쪽 모두를 떠날 수 있다."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명상하라. 그리고 나서 부정적인 측면을 명상하라. 그때 당신은 양쪽 모두 떠난다. 당신은 그 어느 쪽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가 처한 양쪽 모두를 떠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삶을 바라보라. 당신이 태어난 것에 대해 명상하라. 당신은 아기로 태어났고 이제 자라났다. 당신은 젊은 이가 되었다. 당신의 모든 성장에 대해서 명상하라. 그리고 당신은 늙었다. 그리고 당신은 죽는다.
태어났슬 때부터,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만든 순간부더, 하나의 세포로서 당신 어머니 자궁 속으로 들어간 때부터 명상하라. 그리하여 마지막까지, 당신의 육체가 화장되고 당신의 친척들이 그 주위를 둘러선 순간까지 명상하라.
당신 삶의 첫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두루 지켜보라. 그때 당신은 처음과 끝을 모두 떠난다. 당신은 태어남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리고 내면을 바라보라. 거기에 그대가 있다. 결코 당신은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앎과 알지 못함에 대해서,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에 대해서 명상하라. 그때 그대가 처한 양쪽 모두를 떠날 수 있다."
당신은 이것을 긍정이나 부정의 어떤 극에서도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라. 당신은 여기에 앉아 있다. 나는 당신을 본다. 나는 당신을 안다. 내가 눈을 감으면 당신은 거기에 더 이상 없다. 나는 그대를 모른다.
그때 내가 알았다는 이 지식과 내가 모른다는 이 지식 둘 다를 떠난다. 그러면 나는 텅 비게 된다.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한 가지 유형은 지식으로 가득 차 있고 다른 한 가지는 무지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무지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에고를 갖고 있다. 그들은 무지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무지하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한 쪽편 사람은 지식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다른 쪽편 사람은 무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들 둘 다 어떤 것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을 품고 있다. 그 양쪽 모두를 떠나라. 앎과 알지 못함을 떠나라. 당신은 양쪽 모두 아니다.
무지하지도 않고 알고 있지도 않다. 긍정의 편과 부정의 편 모두를 떠나라. 그때 당신은 누구인가? 갑자기 당신에게 그 그 누구란 것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 당신은 초월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부정과 긍정을 양쪽을 무두 떠날 때 당신은 아무도 아니게 될 것이다.
현명하지도 무지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사랑과 증오도 떠나라. 우정과 적의도 떠나라. 모든 양극을 떠날 때 당신은 텅 비게 된다.
당신은 지금까지 한 쪽편만 집착하고 다른 한 쪽편을 멀리해 왔다. 당신은 무지를 멀리하고 지식에 집착해 왔다. 당신은 고통을 멀리하고 쾌락에 집착해 왔다. 당신은 적들을 멀리하고 친구들에 집착해 왔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그 역으로 사라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친구를 멀리하고 적에게 집착해 왔다. 그들은 사랑을 멀리하고 증오에 집착해 왔다. 그들은 부를 멀리하고 가난에 집착해 왔다. 그들은 경전이나 지식따위를 멀리하고 무지에 집착해 왔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위대한 은둔자로 여겨져 왔다. 당신이 무엇에 집착하든 지 그들은 당신의 반대편에 집착한다. 하지만 어느 한 쪽에 집착하는 것은 똑 같다.
그리고 그 집착이 문제다. 당신이 집착한다면 당신은 텅 비어질 수 없다. 집착하지 마라. 어떤 긍정이나 부정에도 집착하지 마라. 집착하지 않을 때 당신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거기에 있다. 집착 때문에 당신은 가려져 있다.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은 드러날 것이다. 당신은 노출될 것이다. 당신은 폭발될 것이다.
자, 마지막 방편이다.
110-2.
서양의 경우 그들은 물건마다 가격을 붙여 놓는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계산적으로 되어 간다. 그들에게 있어서 시간 낭비 따위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사고 파는 것은 단 몇 분이면 끝날 수 있다. 그저 상품에 가격표를 붙여 놓으면 그것으로써 충분하다. 그런데 왜 물건 하나 파는 데 한 시간 이상을 소비하고 있는가? 그러나 그렇게 되면 상거래는 더 이상 게임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이 고정된 틀 속에 박혀 버린다. 상거래는 이제 기계로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장사꾼은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되었다. 단골손님도 필요 없게 되었다.
계산적일수록 거기에 인간성은 사라져 간다. 오직 기계화되는 것만이 남는다. 아직도 인도의 시골에서는 값의 흥정이 계속되고 있다. 이는 이미 사고 파는 단순한 상거래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게임인 것이다.
따라서 게임은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가치가 있다. 이 게임을 통해서 두 사람은 깊이 연결된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시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여기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그것을 즐겨라.
우리의 마음은 상거래 차원에 있다. 우리는 오직 business를 하기 위한 기계로 훈련되어 왔다. 그래서 명상을 할 때조차 그 결과를 계산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지 당신은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한다.
"물론 명상은 더욱 더 진전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더욱 더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평온과 침착이 더해 갑니다. 그런데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어느 날엔 가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nirvana의 경지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축복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그 '아무 일'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그는 지금 어떤 종류의 이익을 찾고 있다. 분명한 이익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침묵과 행복은 불분명의 이익이다. 그렇게 때문에 당신은 그것들을 손에 잡을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는 더욱 없다. 그것을 상품화시키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을 뿐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소위 오랫동안 명상했다는 사람들조차 이렇게 말한다.
"저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
물론 그들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지금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행복해지지 못할 것이며 영원히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뭔 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에서조차 기대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명상을 통해서 그것을 얻을 수 있슬 것이라고 믿었다.
장사꾼은 게임을 그리 즐거워 하지 않는다. 그리고 게임을 즐기지 않는다면 명상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유희적으로 되라. 더욱 더 유희적으로 되라. 게임 속에서 시간을 물 쓰듯이 하라. 시간을 휴지처럼 내 버려라. 어린 아이와 함께 그저 재밌게 유희하라.
거기에 아무도 없슬 때조차 유희하라. 방 안에서 당신 혼자 춤추고 즐거워 하라. 깨가 쏟아지도록 재미있어 하라. 그러나 그 순간에 당신의 마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대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러고 있는가? 춤추고 노래하고.... , 내가 미쳤단 말인가?"
이것을 수련하라. 시간이 날 때마다 사업에서, 일에서 뛰쳐나와라. 그리고 놀이를 시작하라. 마음껏 웃고 춤추고 노래하라. 무엇이든 지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면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게임으로서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나 이익 따위는 생각하지 마라.미래를 생각하지 마라. 지금 여기 현재로서 충분하다. 이제 당신의 내면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생각내키는 대로 그 생각들과 유희를 즐길 수 있다.
생각의 꽃송이들을 이곳 저곳으로 마구 던져라. 거기로 그것들과 함깨 춤춰라. 절대로 심각해지지 마라. 심각해지는 것은 금물이다.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그들의 마음에 대해서 무의식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의 마음이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가는 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러면서 어딘 가로 끝없이 표류하고 있다. 이 마음의 장난을 알아 차린다면 당신은 당황하게 될 것이다.
마음은 항상 작용을 통해서 흘러간다. 개가 짖는다. 당신의 귀에 그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당신의 마음의 연상이 시작된다. 우선 개를 기르고 있는 친구가 생각난다. 그 친구에게는 아내가 있다. 그 아내는 예쁘다.
그녀가 어느 날엔가 당신에게 눈웃음을 던졌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연상의 흐름 속에서 당신은 마침내 완전히 잠겨 버린다. 지금 밖에서 개가 짖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개 짖는 소리가 당신에게 생각을 일으키게 해서 당신으로 하여금 연상의 물결 속으로 흘러가게 했다는 사싫을 잊어버리고 만다.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똑같은 개가 똑 같은 상황 속에서 또다시 짖게 되면 당신은 다시금 같은 연상 작용에 빠지게 된다. 친구에서 개로 아내로 예쁜 아내로 눈웃음으로.... , 그것은 끝이 없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두뇌에 전극을 연결함으로써 많은 과학적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두뇌의 A 지점을 건드림으로써 A의 기억이 되살아나게 된다. 그때 당신은 그 기억의 영상들을 보게 된다.
다섯 살 적에 뜰에서 놀던 그 모습을, 나비를 잡으러 뛰어다니던 이린 시절의 정경을 보게 된다. 이와 동시에 당신의 모든 상황은 다섯 살 때로 돌아간다. 당신은 말할 수 없는 즐거움에 취해 있다.
공기는 맑고 꽃향기 가득한 정원이며, 모든 것이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다. 이것은 단순한 기억만은 아니다. 당신 전체가 다섯 살 때의 에너지 상태로 변화된다. 그때 연결했던 전극을 떼어 낸다. 그와 동시에 그 기억들은 즉시 중단된다.
그러다가 또다시 A 지점을 자극하면 또 똑같은 기억이 되살아 난다. 이것은 마치 녹음기와 같다. 일단 한 번 녹음된 tape를 반복해서 되돌리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똑같은 소리가 들릴 것이다. 당신의 두뇌 장치는 이와 똑같다.
두뇌는 수 백만 개의 기억들을 같고 있다. 수 백만 개의 녹음 세포들을 갖고 있다. 일단 여기에 녹음된 기억들은 수 만 번이고 똑같이 반복할 수 있다. 3백 번 이상이나 똑같은 기억이 그 녹음 세포에서 되살아 났슴이 한 실험 결과에서 증명되었다.
이를 경험한 사람은 그것이 아주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두뇌 속에 기록된 이 기억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 자신의 기억에 대해서 그 사신은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
전극이 그 지점에 닿게 되면 그 지점에 녹음된 기억들이 되살아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이 기억의 강물 속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3백 번의 실험을 한 뒤에야 그는 자신의 기억을 지켜보는 자가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의 기억들을 지켜본다. 더 이상 그 기억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자로서 지켜보는 것이다. 이제 그 자신과 그 자신의 기억들은 별개로 분리된다. 그 분리의 경험은 특히 명상을 위해서 많은 도움이 된다.
당신의 마음은 기계적인 녹음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당신 자신은 자신의 기억들과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제어될 수 있다. 이제 과학자들은 조만간 우리가 모든 고뇌와 번민의 중심들을 모두 잘라 버릴 수 있슬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다시 같은 것이 된다. 그래서 전체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많은 제자들과 여러 가지 실험을 해왔다. 그들은 같은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의 주시자가 되지 않는 한 그것은 끊임없이 기계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매주 당신의 아내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고 아내 역시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일주일 후에 다시 해보라. 아내는 역시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당신이 알고 있고 아내도 안다.
그러나 그 형식은 이미 고정되어 버렸다. 그것은 기게처럼 계속된다.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당신은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만약 당신이 이 삶 속에서 게임의 즐거움으로 가득 찰 수 있다면 당신의 마음 역시 즐거움윽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때 당신은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TV 화면을 보는 것과 같다. 당신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당신은 구경꾼이다. TV를 보는 자일 뿐이다. 보라 TV를 보라. 그리고 그 drama를 즐겨라. 이것은 좋다든 지 저것은 나쁘다든 지 하는 식으로 말하지 마라. 비난하지도 말고 인정하지도 마라. 이런 행위들은 모두 심각함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여자가 화면에 나오면 '이것은 나쁘다. 나를 유혹하는 악마의 짓거리다.'라고 말하지 마라. 당신을 유혹하는 악마는 없다. 그저 보라. 화면에 나타나는 대로 보기만 하라. 그리고 그것을 즐겨라.
하나의 게임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서도 안 된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그녀를 화면으로부터 끌어내려 하지마라. 끌어내려 하면 할수록 당신은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그녀늘 따라가지 마라. 그녀를 따라가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따라가지도 말고 거부하지도 마라.
이것이 법칙이다. 그저 있는 사실 그대로 바라보라. 그리고 게임을 즐겨라.
그저 바라보기만 하라.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라. 그녀는 당신 기억 속의 한 장면일 뿐이다. 어떤 상황이 당신의 기억 세포를 자극했기 때문에 그녀는 당신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나의 그림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 게임을 벌려라.
당신의 마음과 게임을 벌일 수 있다면 머지않아 마음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마음은 심각함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각함이야말로 중계자다. 마음과 당신 사이를 잇는 다리인 것이다.
자, 세 번째 방편이다.
110-1.
"은혜로운 이어,
유희(遊戱)를 하라.
우주는 텅 빈 껍질
거기에서 그대의 마음이 끊임없이 장난치고 있다."
이 명상법은 유희의 차원이다. 이 점이 이해되어져야 한다. 당신이 비행위적일수록 당신은 허공에, 내면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기 쉽다. 그러나 하루 종일 텅 빈 상태로 가만히 앉아 있슬 수는 없다.
당신은 뭔 가를 해야 한다. 활동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살 수 없다. 삶은 활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대는 몇 시간 동안은 비활동적으로 될 수 있다. 그러나 남어지 시간은 활동적이어야 한다.
명상은 당신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삶의 한 조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그것을 얻었다가도 잃을 것이다. 당신이 한 시간 비행위 속에 있었다면 나머지 23시간은 활동적이어야 한다.
한 시간 동안 비행위 속에 억제된 행위는 더욱 더 강렬해질 것이다. 행위는 당신 비행위 속에서 얻은 것을 모조리 파괴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당신은 또 다시 전날과 같은 일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23시간 동안 쌓여진 행위를 한 시간 안에 없애 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당신 마음의 자세는 활동에 대해서도, 일에 대해서도 변화되어야 한다.
일은 일이 아니라 하나의 유희가 되어야 한다. 하나의 game으로서 여겨져야 한다. 일에 대해 심각해 지면 안 된다. 어린아이 술래잡기를 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무의미하게, 마치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처럼 일해야 한다. 그저 즐겁게 노는 것만 있슬 뿐이다.
문제는 일을 놀이로 여기지 못할 때 생겨난다. 당신은 일 앞에서 심각해 질 것이다. 어깨가 무거워 지며 걱정과 야심이 우글거릴 것이다. 그것은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일 자체에는 아무런 즐거움도 없다.
당신의 모든 관심은 미래에 있다. 미래의 결과에 있다. 하지만 유희 속에는 결과가 없다. 노는 과정이 그대로 축복이며 기쁨이다. 그리고 당신은 격정하지 않는다. 유희는 심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그렇게 나타난다 해도 그것은 일부러 심각한 척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일의 경우 진행 과정을 즐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목적에 결과에 있다. 결과만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과정을 묵살한다면 당신은 행위 자체를 제처 버리고 결과에만 매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유희 속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유희 속에서 만약 당신이 놀지 않고 결과만을 달성하려 한다면 그때 유희에겐 그 결과는 아무 소용이 없는 갓이다.
유희에게는 그 과정을 지내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두 축구 team이 있다. 그들의 전 관심이 승부에만 있다면 그들은 운동장에서 경기를 치르지 않고 동전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를 수 있다. 뭣하러 쓸데 없는 땀을 뺄 것인가?
어차피 한 팀은 이기고 상대 팀은 질 것인 데, 동전을 던져서 쉽게 승부를 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가 없다. 결과만 목적이 아닌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진행 과정이다. 그 게임이 승부가 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차체로서 가치가 있고 즐거운 것이다.
당신의 삶 전체가 이 유희의 차원에 적용되어야 한다. 무엇을 하든 지 행위 그 자체로 전체가 되어야 한다. 여기 결론은, 목적은 필요치 않다. 결과는 전적으로 상관없다. 결과는 반드시 왔고 오고 있스며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머리에 들어 있지 않다. 당신의 마음에 달려 있지 않다. 그저 놀 뿐이다. 즐길 뿐이다.
이것이 바로 Bagabad Gita에서 Krisha가 Arjhuna에게 말하는 의미다.
"신성의 손에 미래를 맡겨라. 그대 행위의 결과는 신성의 손에 달려 있다. 그대는 그저 행위하라."
이 간단한 행위가 하나의 놀이인 것이다. 아르쥬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전쟁이 단지 하나의 놀이라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여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싸워야 하는가? 무엇인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크리슈나에게는 그의 전 삶이 하나의 놀이였다. 하나의 게임이며 연극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즐기고 있었고 전혀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 순간을 강렬하게 즐겼고 결과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다.
아르쥬나는 크리슈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가바드 기타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불합리하다. 이쪽 편이나 저쪽 편이나 모두 나의 친척이며 친구들이다. 나의 친척들이 지금 저쪽에서 나와 싸우려고 한다. 그 어느 쪽이 이기드라도 의미가 없다. 내가 이기면 내 친구와 친척들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누구에게 이 승리를 보여준단 말인가? 누구와 승리의 기쁨을 나눈단 말인가? 승리의 기쁨은 친척들과 친구들과 나뭄으로써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기 이 승리 뒤에는 아무도 없다. 이 승리 위에는 내 친구들과 친척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일 것이다. 누가 내 승리을 인정해 줄 것인가? 누가 '아르쥬나여, 참으로 위대한 일을 했구나'라고 말해 주겠는가? 그러므로 이 정쟁에서 내가 이기든 지 지든 지 모두 우스꽝스런 일이다. 모든 것이 그저 nonsense일 뿐이다."
그래서 아르쥬나는 이 세상을 등지려고 했다. 그는 너무다 심각해져서 사색이 되었다. 이는 결과를 계산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지 그렇게 될 것이다.
바가바드 깈타의 배경은 매우 독특하다. 전쟁은 가장 심각한 사건이다. 당신은 전쟁에 대해서 어떤 유희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수 많은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데도 크리슈나는 당신이 전쟁을 하나의 게임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결과가 어떻게 끝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그저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당신은 단지 전쟁 놀이를 즐기는 병정일 뿐이다. 즐겨라! 결과에 대해서 생각하지 마라.
결과는 신성의 손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결과가 당신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결과를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붙들고 있다면 당신의 삶은 명상적으로 될 수 없다. 이 방편은 말한다.
"은혜로운 이어, 유희(遊戱)하라."
배우로서의 이 태도는 행위 하나하나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즐긴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다. 여기에서 이익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게임을 하는 자는 어떠한 계산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사꾼들을 보라. 무엇을 하든 지 그는 이익을 계산하고 있다. 그 일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 지를 따지고 있다. 고객이 온다. 그에게 고객은 사람이 아니다. 돈으로 보일 뿐이다. 장사꾼은 생각한다.
'이 사람에게서 얼마를 뜯어낼 수 있슬까?"
장사꾼의 마음ㅇ 속에는 지금 고객에게 해야 할 말로 가득 차 있다. 그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 가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은 하나의 거래로서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그는 사람에게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은 오직 '어떻게 하면 이 사람에게서 돈을 뜯어낼 수 있는가'에 있슬 뿐이다.
동양을 가 보라. 그 곳 시골에 가면 아직도 장사꾼은 단지 장사꾼이 아니다. 단골손님도 오자마자 금방 물건을 사지는 않는다. 그들은 거래를 즐기고 있다. 나는 내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
우리 집은 옷 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식구들은 모두 당황해 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직업을 너무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골손님과 몇 시간이고 흥정을 하면서 재미있어하곤 했다.
내가 보기엔 할아버지와 단골손님은 마치 무슨 게임을 하는 사람들 같았다. 그는 그때 단골손님을 데리고 사고 파는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때는 10 rupee짜리 밖에 안 되는 물건을 할아버지는 15 루우피이라고 엉터리로 가격을 부른다. 할아버지는 그 자신을 스스로 알고 있다. 단골손님 역시 이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10 루우피이까지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2 루우피이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올리거니 깍거니 한창 실랑이르 벌인다. 이 실랑이는 몇 시간이고 계속된다. 아버지와 삼촌이 드디어는 화를 냈다.
"도대체 아버지는 뭘하고 있는 겁니까? 왜 정확한 값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 자신의 단골손님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와서 언제나 이렇게 물었다.
"Dada는 어디 있느냐?"
할아버지와 함께라면 옷 사는 일은 이미 사고 파는 상거래가 아니라 하나의 게임이 되기 때문이다. 아주 재미있는 놀이가 되기 때문이다. 손님들은 그까짓 1루우피이나 2루우피이 더 잃어버리는 을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할아버지와 사고 파는 놀이를 아주 즐기고 있었다. 어떤 행위를 막론하고 그 행위가 전체적이면 그 자체로서 몰입해 볼 가치가 있다. 사고 파는 이 게임을 통해서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된다.
사고 파는 이 상거래를 하나의 놀이로 즐기고 있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물건마다 정가를 붙혀 놓으면 성거래는 그저 간단하기 때문이다.
109.
"그대의 수동적인 형상이 살의 벽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빈 방이라고 생각하라.
텅 빔이 일어난다."
이것은 가장 아름다운 방편 중의 하나다. 명상의 자세로 홀로 앉아 있어라. 이완하라. 그대의 등뼈를 곧바로 펴고 몸 전체를 이완시켜라. 마치 몸 전체가 등뼈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하라.
그리고 눈을 감아라. 몇 순간 동안 이완된 느낌을 계속 가져라. 좀 더 고요해 져라. 더욱 더 이완되고 더욱 더 고요해 져라. 몇 순간 동안을 그런 상태로 있어라. 그리고 갑자기 당신의 몸이 살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라고 느껴라.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 집은 비어 있다. 때때로 사념의 구름들이 거기를 지나가고 있슴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들이 당신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은 없다. 그것들은 텅 빈 허공의 메아리라고만 생각하라.
그것들은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뿌리가 없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은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과 같은 경우다. 그것들은 어떤 뿌리도 갖고 있지 않고 하늘에 속한 것도 아니다. 단지 하늘을 배회하다가 사라져 간다.
당신은 몸은 단지 살의 벽일 뿐 그 안에 아무 것도 없다. 생각들은 어전히 흘러 갈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옛 습관 때문에 계속 흘러 들어온다. 그러나 그것들이 근거 없는 뜬 구름이라고 생각하라.
그것들은 당신에게 속한 것도 아니며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것들의 주인은 없다. 당신은 텅 비어 있다. 당신의 옛 습관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어떤 것이라도 붙잡고 싶어한다.
마음과 동일시하고 싶어 한다. 그것을 탐닉하고 집착하려 한다. 그러나 참아라. 그것에 탐닉할 사람도, 그것과 싸울 사람도 없다고, 그 생각에 따라서 뭔 가를 할 사람도 없다고 말하라. 때로는 몇 주가 지나면 생각들은 가라 앉을 것이다. 그것들은 점점 줄어 들 것이다.
구름들은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들이 온다고 해도 커다란 틈새가 생겨날 것이다. 그 틈 새로 맑은 하늘이 보일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의 하늘이 보일 것이다
하나의 생각이 지나가고 다른 생각이 잠시 동안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잠시 동안은 하나의 간격이 된다. 그 간격 속에서 당신은 처음으로 텅 빔이 무엇인 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에 대한 일별이 일찌기 상상해 온 적이 없는 지복을 당신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사실 그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어렵다. 무엇이든 지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당신이 존재할 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거기에 없다. 만일 내가 '당신은 행복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nonsense다.
당신은 거기에 없슬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없는 데 어떻게 당신이 행복으로 가득 찰 수 있겠는가? 행복은 거기에 있슬 것이다. 거기에서 진동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거기에 없다. 깊은 침묵의 당신이 있다.
그러나 당신은 거기에 없다. 깊은 침묵이 당신이 있던 자리에 대신 있슬 것이다. 당신이 거기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상태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은 항상 다른 누군 가가 당신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도로의 자동차 소음들이, 어린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들이, 아내가 부엌에서 일하는 소리들이..... , 누군 가가 당신을 방해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당신 자신 외에 누구도 당신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당신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없다면 방해라는 말조차 성립되지 않는다. 소음은 그저 왔다가 지나갈 것이다. 그 무엇도 못하고 지갈 뿐이다. 거기엔 건드릴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거기에 있다면 그것은 당신을 건드릴 수 있다. 당신에게 즉시 자극을 주고 상처를 입힐 것이다.
나는 설득력 있는 공상 과학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3차 대전이 끝나고 모든 인간이 다 죽었다. 지구에는 오직 나무들만 살아 남았다. 그리고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큰 소리를 만들어 내려고 생각했다.
과거에도 그런 적이 있었듯이, 높은 바위 위에서 떨어졌다. 이전에도 나무는 가능한 모든 짓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 거기에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소리에는 당신의 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들을 인간들이 거기에 없다면 어떤 소리도 만들어 질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여기서 말은 하고 있다. 나는 소리를 만들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당신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무도 여기에 없다면 나는 말을 하지만 소리는 만들어 질 수 없다.
지금 당신이 없다고 해도 내가 소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소리는 만들어 질 수 없다. 소리란 energy에 대한 청각의 반응 현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무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는다면 태양을 떠 오르겠지만 빛은 만들 수 없다. 그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는 항상 태양이 떠 오르면 당연히 거기에 빛이 있는 것으로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면 태양이 떠 올라도 그것은 쓸모없다. 빛은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 빛에 반응해서 '이것이 빛이다'라고 말할 사람이 없다면 빛은 생겨나지 않는다. 빛은 에너지와 당신 시각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장미꽃 혼자만으로는 어떤 향기도 만들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의 코가 필요하다. 누군 가 그 냄새를 맡고 그것이 장미꽃 냄새라고 말할 사람이 필요하다. 코가 없다면 장미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거리의 소음이 방해가 되는 것도 당신 속에 ego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에고는 반응을 하고 시끄럽다고 말한다. 그것은 당신의 해석이다. 때때로 당신은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때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아름답다. 얼마나 멋 있는 음악인가!"
그러나 슬픈 순간에는 음악조차 신경에 거슬린다. 어떤 것이 당신을 통해서 지나가더라도 거기에 주의를 빼앗기지 마라. 그것에 동요되지 마라. 반응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메아리조차 생겨나지 않도록 하라. 이것이 붓다가 말한 nirvana다.
그리고 이 방편은 당신을 도울 수 있다.
"그대의 수동적인 형상이 살의 벽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빈 방이라고 상상하라. 텅 빔이 일어난다."
수동적인 상태로 앉아 있어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당신이 무엇을 할 때마다 행위자가 그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거기엔 어떤 행위자도 없다. 단지 당신이 해위한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는 사람이 걸어거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언어의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가 그렇게 말할 때는 거기에서 실제로 걸어가는 어떤 사람이 있슴을 뜻한다.
그러나 붓다는 거기에 오직 걸아가는 과정이 있슬 뿐이라고 말한다. 걷는 주체는 아무도 없다. 당신은 웃고 있다. 그러나 이 말에서 어떤 웃고 있는 주체가 생겨난다. 그러나 붓다는 거기에 웃슴의 행위만이 있슬 뿐 웃는 자는 없다고 말한다.
당신이 웃슬 때 이 점을 기억하라. 웃고 있는 그 주체를 찾아보라. 당신은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단지 웃슴민이 있다. 그 행위 배후에는 아무도 없다. 당신이 슬플 때 슬퍼하는 누군 가는 없다. 단지 슬픔만이 있다. 이 사실을 보라.
단지 슬픔만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다. 단지 웃슴만이, 행복만이, 불행만이 있다. 그 배후에는 어떤 주체도 없다.
단지 언어 때문에 당신은 항상 두 가지를 생각한다. 어떤 움직임이 있스면 반드시 움직임에 주어를 갖다 붙인다. 주어 없이는 동사가 있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단지 웃직임민이 홀로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그 주체를 본 적이 있는가? 웃고 있는 주체를 보았는가? 붓다는 그것이 삶의 흐름일 뿐 그 속에 어떤 살아 있는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기에 죽음이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죽어 가는 사람은 없다. 죽음이라는 현상만이 있다.
붓다에게는 당신이 이중성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이중성이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나'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붓다는 오직 말하는 행위만이 있슬 뿐 말하는 주체는 없다고 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다.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것이다. 허지만 우리는 이것을 납득하기가 어렵다. 이중성 속에 우리의 마음이 너무 깊이 뿌리 박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생각할 때마다 반드시 행위자를 생각한다.
그래서 수동적인 현상이 명상에 좋다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보다 쉽게 텅 빔 속으로 떨어질 수 있다. 붓다는 말한다.
"멍청하지 마라. 명상 속에 있어라."
그 차이는 엄청나다. 나는 붓다의 말을 다시 반복한다.
"멍청히자 마라. 명상 속에 있어라."
당신이 명상을 한다면 거기에 행위자가 들어온다. 당신은 자신이 명상을 하고 있다고 계속 생각할 것이다. 명상은 하나의 행위가 된다. 붓다는 '명상 속에 있어라'고 말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수동적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어떤 것도 하지마라. 그 어떤 행위자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래서 때때로 생각 속에서 행위자를 잃어버릴 때 당신은 갑작스런 행복감이 치솟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당신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춤추는 자는 사라지고 춤만 남는 순간이 온 것이다.
갑작스런 지복감이, 은총이, ectasy가 일어난다. 알 수 없는 지복감으로 가득 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오직 행위만이 남아 있고 행위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전투를 앞두고 있는 병사들은 깊은 지복감을 느낀다. 그들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어떤 순간이라도 그들은 죽을 수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그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들은 공포로 전율한다. 그러나 그 공포를 매일 같이 늘 느낄 수는 없다.
그것에 익숙하면 그것을 받아 들인다. 그때 공포는 사라진다.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슬 때마다 어떤 이상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행위가 잊혀지고 오직 임무만이 남는다. 전투 행위만이 있는 것이다. 그때 '나는 살아 있다'라는 느낌을 잃어버린다.
그 살아 있다는 느낌으로 있는 한 지복감을 맛볼 수 없다. 그때 당신은 행위 속에 전적으로 몰입해 있지 않은 것이다. 삶이 경각에 달렸슬 때 당신은 이중성을 제대로 챙길 수 없다. 바로 행위가 전체가 된다. 그때 갑자기 당신은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지복감을 느낀다.
전사들은 일상적인 삶이 가져다 줄 수 없는 깊은 지복감을 알고 있다. 전쟁이 그들에게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과거 인도에서 Brahman보다 Kshatria, 무사 계급이 Mokaha를 성취하는 일이 더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Jaina교의 24명의 Tirtankara들이나 Ram, Krisha, 붓다 이들 모두가 크샤트리아 계급 사람들이었다. 바로 그들이 가장 지고한 정점의 경험들을 성취했던 것이다.
Baisha 즉 상인 계층이 그것을 성취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은 안전성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이중성 속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 지 전체적일 수가 없다. 언제나 빠져 나갈 구명이 있다.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전체적인 행위가 될 수 없다.
그것을 즐길 수는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문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잃는 것은 돈 뿐이다. 목숨이 달려 있지 않다. 차라지 도박사가 상인보다는 가능성이 더 크다. 도박사들은 위험 속에 움직인다.
그들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거는 순간 행위자를 잃어버린다. 도박이 그토록 매력적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그 매력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도박 속에는 어떤 미지의 것이, 삶의 깊은 신비가 숨겨져 있다. 그렇지 않다면 도박은 그토록 매력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이 수동성.... ,당신이 명상 속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든 지 수동적으로 되어야 한다. 붓다는 앉아 있다. 인도에서는 가장 수동적인 asana(자세)를 개발했다.
그것이 바로 sidhasana인 것이다. 그것은 붓다의 좌법이기도 하다. 그 상태로 앉으면 가장 깊은 수동성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눕는 것조차 가장 수동적인 자세는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잠을 청하는 것이다.
왜 싯다아사나가 그토록 수동적인가? 그것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자세일 때 육체는 자물쇠로 잠겨진 것 같다. 전류는 육체 내부로 흐르고 밖으로 누출되지 않는다. 이제 과학은 어떤 자세 속에서 당신이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슴이 과학적 현상임을 증명하고 있다.
육체가 에너지를 방출할 때 육체는 계속 에너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은 능동적인 상태다. 그래서 가장 수동적인 상태는 어떤 에너지도 방출되지 않는 상태여야 한다.
오늘 날 서구 사회에는, 특히 영국에서 환자들을 치료할 때 환자의 몸 속에 전기 순환 회로를를 만든다. 많은 병원에서 그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환자는 전기선이 어어진 침대 위에 눕는다. 그 전기선은 환자의 육체의 전기가 밖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패쇄회로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30분간 거기에 누워 있스면 충분하다.
그렇게 하면 그는 깊은 이완을 경험하게 되고 에너지로 충전된다. 보다 활기 넘치고 강해진다. 그는 단지누워 있기만 했는 데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모든 고대의 문명 속에도 그 원리를 적용한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 사람이 밤에 잠을 잘 때 어떤 방향으로 누으면 에너지가 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것은 지구가 자력(磁力)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특별한 방향으로 눕게 되면 그 자력이 하나의 순환을 이루게 되고 에너지의 쓸데없는 방출을 막을 수 있게 된다. 만약 잘못된 방향으로 눕게 되면 당신의 자력이 지구의 자력과 저항을 일으키게 되고 당신의 에너지가 소진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잠을 깨어도 계속 피로를 느낀다. 잠은 당신에게 활력과 에너지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잠을 자고 일어나도 개운치가 않다. 그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눕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구의 자장에 반대 방향으로 눕는다. 결국 그들의 에너지는 누출되고 흘어진다.
그래서 오늘 날 과학자들은 육체가 하나의 전기 회로라고 말한다. 그 회로는 패쇄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싣다아사나의 자세로 앉아 있는 요가 수행자들의 자세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그 상태에서 육체는 최소한의 에너지만을 소비한다. 따라서 에너지는 충전된다. 그리고 에너지가 충전될 때 내부의 발전기는 일할 필요가 없다.
어떤 내적 활동도 필요없는 것이다. 그 육체는 수동적으로 된다. 이 수동성 속에서 당신은 쉽게 텅 빌 수가 있다.
이 싯다아사나의 자세에서 당신의 등뼈는 곧게 세워진다. 그리고 등뼈가 곧으면 몸 전체가 곧어진다. 그 사실에 대해 많은 과학적 연구가 이루어 졌다. 당신의 육체가 곧을 때 전체적으로 곧아진다. 그때 당신은 중력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게 된다.
당신이 육체가 편치 않다고 느낄 때 그것은 중력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중력의 방향에 수직으로 앉게 되면 중력의 저항을 가장 적게 받는다. 그때는 중력이 당신의 등뼈에만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서서는 잠들기가 어렵다. 물구나무서기 자세인 shirshasana에서는 잠 자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잠을 들기 위해서는 당신이 땅에 수평으로 누워야 한다. 왜인가? 그때 땅의 중력이 당신을 최대한의 힘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당신의 무의식을 최대한으로 끌어당긴다. 잠자는 동안에는 당신이 땅에 누워야 한다.
그래서 중력이 당신의 온 몸에 미치게 해야 한다. 모든 세포에 그것이 미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당신은 무의식이 될 수 있다. 동물들이 인간보다 더 무의식적인 것도 당신처럼 직립보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두 발로 직립보행을 하면서부터 진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때 중력은 가장 적은 영향을 미친다. 그 때문에 인간은 좀 더 깨어 있슬 수 있게 되었다.
싯다사아나에서 에너지의 방출은 최소한이 된다. 그때 육체는 완전히 비활동적이고 수동적으로 된다. 그리하여 외부로 열린 문이 닫힌다. 아무 것도 나가지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한다.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가 펼쳐진다. 눈은 감겨져 있고 손과 발은 잠겨져 있다. 에너지는 그 속에서 돌고 있다. 에너지가 내부의 회로를 돌 때만다 그것은 내적 rythm의 음악을 만들어 낸다. 당신이 그 음악을 들을수록 더 깊은 이완을 느낀다.
당신의 수동적인 형상이 텅 비었다고 상상하라. 텅 빈 방처럼 느껴라. 살이 바로 그 벽이다. 그리고 계속 텅 빔 속으로 떨어져라.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느낄 때가 올 것이다. 아무도 없다. 집은 텅 비어 있다. 그 집의 주인은 사라졌다. 증발해 버렸다.
그 틈에서, 그 간격 속에서 당신은 내면에도 존재 않게 된다. 오직 신성만이 존재한다. 당신이 사라질 때 신이 존재한다. 당신이 없슬 때 축복이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라지려고 노력하라. 내면에서부터 사라져라.
자, 두 번째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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